이상규 명예교수, 고신대

코로나 환경이 여러 가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 한 가지가 ‘대면예배’ 논란이다. 정부는 방역을 이유로 개신교회의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교회 행사에 대해 여러 가지 금지를 요구 하고 있다. 심지어는 찬양연습을 하지 말라, 통성기도를 중지하라, 식사를 하지 말라는 식의 세부지침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런 요구는, 설사 그것이 잠정적인 요구라 할지라도, 종교의 자유를 침범하는 일이자 법의 공정한 적용을 반하는 위법이다. 종교의 자유란 종교행위의 자유를 포함하는데, 감염의 위험이 있다면 교회는 방역 지침을 준수하되 종교행위는 교회가 자율적으로 정해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연합기관은 겨우 성명서 몇 번 발표할 뿐 정부 지침이 부당하고 위법적임에도 불구하고 묵종하고 있다. 정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방역을 위해 협조를 구할 수 있고 교회는 자율적으로 예배 지침을 정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할 경우 해당교회에 한하여 제한적인 국가권력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예배 방식에 대하여 국가 권력이 강제하는 것과 교회가 자율적으로 예배 지침을 정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이런 점을 논한 여유가 없다. 단지 국가기관에 의한 예배에 대한 제한이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배와 같은 종교행위에 대한 제한조치는 종교의 자유를 훼손하는 기독교 탄압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 탄압은 반드시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념이나 사상, 이데올로기 혹은 법적인 제한, 반기독교적 입법도 종교 탄압일 수 있다. 코로나 환경을 빙자한 탄압도 적지 않아 코로나 펜데믹으로 전 세계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기대어 보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의 첫 번째 단계가 예배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설교하지 못하게 했다(행 4:17-18, 5:40 참고). 초기 기독교가 공개적으로 예배드릴 수 없어 불가피하게 비밀리 가정집에 모여 예배드렸다. 그래서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아가서 4장 12절을 인용하여 ‘잠근 동산’(hortus conclusus, enclosed garden)이라고 불렀다.

소련, 중국, 북한에서 취한 기독교회에 대한 첫 번째 조치가 예배 금지였다. 예배를 감시하고 방해하고 종래에는 금지시켰다. 한마디로 집회금지였다. 예배행위는 항상 공격을 받아왔으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의 자유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회로 존속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박해의 두 번째 단계는 예배당 폐쇄였다. 구소련이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근년 중국에서 파괴된 교회당, 불타는 십자가를 보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도 그러했다. 주기철 목사를 투옥시키고 그의 산정현교회를 폐쇄했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교회통폐합을 강행하였는데, 1942년 당시 경남지방에는 325개 처 교회가 있었는데, 108개 교회를 폐쇄시키고(통폐합이라는 이름으로) 217개 교회만 존립케 하여 교회수를 3분의 1로 축소시켰다.

일부는 군수창고로 전용했다. 폐쇄는 파괴로 이어졌다. 북한에서의 교회 폐쇄와 파괴는 만행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3,000개 처의 예배당, 2천5백여 명의 교직자, 3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이른바 미신타파돌격기간(1946.11.24-30)을 설정하고 전 지역의 영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신자명단을 작성했다.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가 예배 방해였다.

주일 선거를 실시하고 주일에 직장과 학교 출근을 명하고, 주일 노동을 실시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을 이용하여 어용 조직을 만들었다. 해방 후 불과 4년이 못되어 기독교신자는 10만 명이 감소되었고, 6.25 전쟁을 거쳐 가면서 거의 소멸되었다. 학살과 처형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고는 6.25때 미군 폭격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공산화 이후 1937년에 1,900개 예배당이 폐쇄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중국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기독교 탄압의 세 번째 조치는 교회지도자들의 투옥, 감금, 학살이었다. 북한에서 신사참배 거부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김화식 김철훈 김진수 등 40여명의 지도자들이 바로 죽임을 당했다. 볼세비키 혁명이후 곧 1918-1919년에 28명의 러시아정교회 주교, 1,215명의 성직자들을 총살했다. 공산정권 하에서 종교의 자유는 이름뿐이었고 기독교인에 대한 자비는 사라졌다. 또 당시의 1,026개 수도원 중에서 687개 수도원을 폐쇄시켰다.

교회 지도자가 사라지자 교회는 자연히 소멸되었고,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러시아에서나 중국, 북한에서도 그냥 집회를 금지한 것이 아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다. 권력지향적인 교회지도자들이 순응했다. 예배의 자유가 그냥 주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대면 예배를 강행했다고? 그런 교회, 그런 목회자마저 없다면 코로나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 될 것이다. 국가 권력이 대면예배를 제한하는 것과 교회가 자율적으로 대면예배를 제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종교의 자유는 한 사회의 건전성에 대한 바로미터가 된다.  

 

출처: 기독교보 입력 2021.02.03 10:17

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76

 

예배 제한 조치 어떻게 볼 것인가? - 고신뉴스 KNC

코로나 환경이 여러 가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 한 가지가 ‘대면예배’ 논란이다. 정부는 방역을 이유로 개신교회의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교회 행사에 대해 여러 가지 금지를 요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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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위기입니다.


교회가 위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위기입니다.

교회가 위기라는 현실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회사가 망하는 것은 회사가 위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망하는 회사는 망한 후에야 깨닫고 후회합니다.
조선이 망할 때에도 난파선 안에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망해가는 중국과 망하게 만들 야욕을 가진 일본에 서로 구원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무도 서로 힘을 합해서 먼저 조선(朝鮮 Chosun)이라는 조선(漕船 ship)을 구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망하는 것은 아주 자명한 운명이었습니다.

교회가 위기라고 말하면서, 그 위기에 대해 대처하는 교회가 있나요?
왜 위기 의식을 가지고, 교회 부흥을 위해 일하지 않을까요?
지독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거나 배가 부른 까닭에 영적 관심이 죽어버린 까닭이지요.
멸망의 폭풍 전야에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이 있지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지상 교회는 망할 수 있습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영적 고통, 곧 성령의 탄식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부흥해야 합니다.

그리고 코스모스 교회는 부흥합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부산 해운대 장산역 근처 신도시 시장 3증에 있으며, 교회 가까이에 백병원, 부흥초등학교, 부흥중학교, 부흥고등학교가 있습니다.

흔히 고객을 협력자라 부른다. 고객은 최고 경영자다. 고객은 왕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객은 나비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렇게 멋진 통찰력으로 단문이면서 강렬한 리듬을 타며 머리에 꽂히는 명문을 쓴 잭 트라우트는 항상 도전을 줍니다. 우리 말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잭 트라우트의 차별화 마케팅>이었습니다. 원제는 <Differentiate or Die>(차별화하든지, 죽든지)로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잭 트라우트의 필력을 살리는 길인데, 이 동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동사이므로 <차별화하라, 아니면 뒈져라>로 해야 하는데, 이건 너무 강하다는 느낌이지요? 동사는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잭 트라우트의 글은 아주 자주 단문과 시적인 운율과 음악적인 화성이 잘 조화를 이룹니다. 논리적인 글에 멋진 감동이 있지요. <차별화하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은 타협적입니다. 이건 '혹은'(or) 곧 선택에 초점을 맞춘 번역입니다.

사진 출처: 교보문고

잭 트라우트의 문장에 놀라서 잠시 옆길로 샜습니다. "그리고 고객은 나비다"(잭 트라우트의 차별화 마케팅, 63쪽). 저의뇌는 잭 트라우트의 글을 읽는 과정에서 아주 잽싸게 '고객'을 '교인'이라는 말로 대입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인은 나비다"라는 말이 머리에 꽂히는 순간, 잠시 뇌가 정지했습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뒤따라 나오는 이 사족같은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줍니다. 하나는 그 말 그대로 독자들은 충분히 알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독자들이 충분히 알 거라면 이 말은 사족이 됩니다. 왜냐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면 이 말은 확실하게 사족입니다. 그러면 독자의 상식으로 깨달으라고 하면서 독자에게 공을 던진 것입니다. 구차하게 이 말을 설명하는 것은 글을 비만증 환자처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코스모스 교회는 나비가 오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전도법은 나비를 잡으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하며, 나비가 스스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코스모스 꽃을 처음으로 찾아야 하는 나비, 이꽃 저꽃 찾아다니며 방황하는 나비, 더 이상 꽃을 찾으려 하지 않는 나비를 어떻게 스스로 찾아오도록 하느냐는 것이 코스모스 교회의 과제입니다. ('고객은 나비다'는 잭 트라우트의 말은 찾아온 나비가 언제든 다른 꽃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우리는 고객들의 변화하는 요구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서비스의 제왕인 노드스트롬 백화점이 판매 신장률이 악화되고, 이윤이 감소한데다 주식마저 변덕을 부리고 있을 때, '비즈니스 위크'지에 <대단한 서비스만으로는 부족했다>(1999년 4월 19일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E 노드스트롬은 "고객들의 변화하는 요구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잭 트라우트의 차별화 마케팅, 70쪽)고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는 잘 압니다. 해결책을 차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변화하는 요구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이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표본되어 있는 나비를 더 예쁘게 장식하거나, 단단히 묶어두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장식하려고 하면 더 예쁜 곳으로 날아가고, 단단히 묶으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나비가 날아오도록 해야 하고, 날아온 나비가 창공을 훨훨 날게 해야 합니다. 나비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름답게 수를 놓아야 합니다.

한 마리 나비의 날개 짓이 온 우주에 폭풍을 일으킬 것입니다.

나비의 꿈을 위해 코스모스 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세운 서비스를 합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부산 해운대구 좌동 1429-1 신도시시장 3층, 해운대 백병원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라


코스모스 교회는 다릅니다.


매킨토쉬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한 입 베어먹은 사과지요.


매킨토쉬는 사과의 품종입니다. 매킨토쉬는 스티브 잡스가 세운 애플 컴퓨터의 컴퓨터 이름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사과 한 입 베어먹고선 IBM을 먹어치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먹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셨나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코스모스(cosmos)가 보이시나요?


그리고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코스모스 교회가 보이시지요.


코스모스 교회는 아이를 바꿉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사람을 바꿉니다.


코스모스 교회는 세상을 바꿉니다.


그리하여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코스모스 교회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다르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말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라


"Think different!"라고 했더니, 영어를 전공하는 어느 중년의 교수님이 제게 정중하게 영어 표현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거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인데요, 라고 했더니, 그렇게 쓸 수도 있지요.


제가 대학교 홍보 카피로 "Think different!"라는 표현을 썼더니, 반대하는 교수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광고홍보학과 교수님 한 분은 거세게 반발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조선일보에 한 면 전체에 일본 자동자 홍보 카피로 똑같은 표현을 썼고, 그뒤 삼성자동차 SM3 홍보에서도 이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저의 소견에 우리 대학을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표현으로는 "Think different!"가 최고였습니다. 다른 대학과 뭐가 다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영어 표현 때문에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영어를 조금 안다고 하시는 분들은 다들 입방아를 찧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홍보물에서는 잡음이 없도록 만인(?)에게 부담없는 "Think differently!"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ly'가 너무 거추장스럽게 여겨서 나중에 남이사 뭐라 하든지 과감하게 빼버렸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어디 가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는 아무 성당이나 가까운 곳으로 갑니다. 그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느 성당이든 모두 똑같은 '보편적 교회'(Catholic은 보편적 교회라는 의미임)에 가는 것이니까요. 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머리는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교황이니, 곧 신의 대리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성경)보다는 눈에 보이는 가견적 교회(로마 교황청)가 우선이고, 설교나 기도가 아니라 예배 의식이 중요합니다.


반면에 (개혁) 교회는 교회마다 다릅니다. 로마 교회가 다르고, 고린도 교회가 다릅니다. 형식적인 예배 의식은 없었고 오로지 말씀과 기도, 그리고 교제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참된 교회를 향하여 전투적으로 살아야 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오직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였습니다. 지상 교회가 얼마나 약한지, 그래서 역사적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로마 교회도 없고, 빌립보 교회도 없습니다. 하지만 코스모스 교회는 있습니다. 

코스모스 교회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라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부흥해야 합니다.

그래서 코스모스 교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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